음악산책

베토벤의 집

한지톡톡권영애 2012. 5. 26. 09:48

 

하일리겐슈타트 



  유달리 긴 겨울이 지나고, 이제야 좀 봄기운이 오는 것 같다. 이제 다음 번 겨울까지는 다시는 그 지겨운 코트를 입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좀 쌀쌀한 날씨도 코트 없이 잘 버틴다. 봄의 바람을 조금이라고 먼저 느끼고 싶어서다.

  빈 이야기도 이제 봄의 이야기로 좀 넘어가 볼까 한다. 봄바람이 불고 아지랑이가 보일 것 같으면, 오늘도 생각나는 곳이 있다. 하일리겐슈타트......


  이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빈에 와서 작곡가들의 집을 찾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도 그리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뭐 굳이 찾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좋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혹시라도 실망할 까봐서 미리 얘기해 두는 셈이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베토벤의 집이다. 한 마디로 빈에서 베토벤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것이다. 너무 찾기가 어려워서 일까? 아니다. 베토벤의 집이 너무 많아서다. 물론 베토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유로서의 집을 가진 적은 없다. 그는 늘 집을 빌려서 살았으며 늘 이사 다녔다. 베토벤은 빈 시내에서만 거의 80여회의 이사를 하였다. 대단하다. 빈의 집들 중에서 세 집 건너 한 집이 베토벤 집인 것이다. 그러니 빈에서 베토벤의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겨우 주소를 얻어서 한참 찾아가면, 그냥 큰 아파트인데 몇 층 어딘가에 베토벤에 살았었다는 식이다. 그러니 사유지인 가정집에 들어가 볼 수도 없다. 또 어떤 집은 약국으로 변해있다. 또 다른 곳은 그냥 몇 년부터 몇 년까지 베토벤이 살았다는 간판만 붙어 있는데, 이만하면 나은 곳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곳이 더 많다. 빈 시민들에게는 베토벤이 살았다는 것이 전혀 흥미를 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베토벤은 80번 이상이나 이사를 했다는 셈이다. 그렇다면 베토벤은 음악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삿짐 싸기의 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삿짐센터를 새로 차릴 분이 계신다면, 회사 이름을 ‘베토벤 이삿짐센터’를 짓는 건 어떨까?

  너무 그럴 듯하다. 물론 이삿짐을 나르는 직원들은 머리에 베토벤 파마를 하고, <운명> 교향곡을 틀어놓고 짐을 옮긴다....... (죄송합니다.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베토벤 집이 있다. 바로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그의 집이다.

  내 어렸을 때 읽던 베토벤에 대한 해설서가 하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공들여서 만든 책으로 베토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과 적지 않은 사진들이 참고로 들어있었다. 그것을 몇 번이나 거듭해서 읽었으니, 지금까지도 베토벤이란 인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나의 많은 인상들은 그 때 정립된 것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그 책에 보면 베토벤의 유서에 관한 부분이 상당량 할애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서를 설명할 때는 꼭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란 이름으로 표현되곤 했던 것 같다. 누렇고 낡은 종이 위에 베토벤의 그 휘갈겨 쓴 글씨들, 그리고 있는 낙인과 서명 등, 한 개도 아니고 몇 개의 유서들이 페이지들을 채우고 있고, 유서들 사이에는 베토벤의 데드마스키나 어두운 표정의 초상화들이 있어서, 나로서는 영 기분이 좋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는 많은 유서를 썼다는 것이고, 그는 불운한 사랑을 했다는 이야기도 보통 덧붙여져 있었다. 그 어린 시절에 나는 그가 왜 유서를 몇 통이나 써야했는지, 그는 정말 죽음을 늘 옆에 두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왜 죽지 않았는지,..... 많은 궁금증이 있었지만, 내가 자라면서 그것들은 그저 그런 이야기들로서 내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나 책에서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나 유서 이야기만 나오면, 또 그 이야기가 나왔구나 하면서 무덤덤해져갔다. 그냥 살기 바빴던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내 주변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자살을 경험하고 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제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일이 되고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나에게 베토벤이란 인물의 유서는 아직 수면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베토벤이라면 훌륭한 음악을 작곡한 음악가였을 뿐이다. 그의 음악은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을 뿐이다.

  그러다가 빈에 와서야 어느 날 갑자기 하이일리겐슈타트란 지명이 생각났다. 어려서부터 이것은 나에게 무슨 꼭 사람이름 같이 느껴져서, 그것은 동네 이름이라는 실감이 나는 데에는 빈에서도 한참이 걸렸다.

  나는 호텔의 한 구석에서 누워 뒹굴면서 빈을 소개한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지명을 보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래, 하일리겐슈타트를 가보자. 갑자기 가보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내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살다보면 정말 김치찌개가 먹고 싶으면 김치찌개를 먹고, 정말 고기를 먹고 싶을 때가 있으면 먹어야 하는 것이다.

   하일리겐슈타트의 버스 정류장에는 아름드리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찾기 쉽지 않았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도 같다. 트램과 버스를 교대로 몇 번을 갈아타고, 빈 교외의 한 구석에 걸치듯이 숨어 있는 작은 마을을 찾았다. 하일리겐슈타트란 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채, 하일리겐슈타트라고 적힌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린다. 5월의 햇살이 조금 따갑게 그러나 기분 좋게 내려쬔다.

  너무나 작은 마을이다. 가게 같은 장사하는 집은 두어 개 밖에 없고 주택들이 언덕으로 쭉 눌어서 있다. 현대적이거나 쾌적한 주택들도 아니고,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이전에도 그리 넉넉한 동네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다만 길 아래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멍청하게 새로 지은 좀 큰 쇼핑센터와 학교나 무슨 기관 같은 멋없는 빌딩도 보인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숲이 가득히 펼쳐져 있다. 바로 이곳을 하일리겐슈타트의 숲이라는 부른다.

  작은 표지판에 ‘베토벤 어쩌고....’라고 적혀 있다. 바로 저긴가 보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서 골목을 올라간다. 모퉁이를 돌자 마치 어린 시절 우리 동네의 주택가 같은 분위기의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골목이 나타난다. 옛날 우리 동네에도 이런 골목이 있었다. 여름 방학 같은 하가한 낮에 그곳을 천천히 걸어가면, 장미넝쿨 우거진 담 너머에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나 와이만의 <은파>가 흘러나오곤 하였다.

  잠시의 행복 속에서 골목을 걸으면 그냥 느낌만으로도 “바로 이 집인가 보다”하는 집이 나타난다. 마치 어린 시절 하얀 레이스를 달고 <소녀의 기도>를 치던 소녀의 집에 들어가듯이 그런 기분으로 긴장하고 조심스럽게 대문을 넘는다.

  

유서의 집은 이름과는 달리 너무나 다정한 집이다.

 아, 작은 안마당이다. 가운데에 큰 나무가 우거져서 5월의 녹음을 자랑한다. 너무나 기분 좋은 작은 마당이다. 마당 한 편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작고 낡았지만 그런대로 좋은 구도로 구부러지면서 놓여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집이 기역자로 꺾여 있고, 옆이 한 채가 더 있으며 마치 안마당을 둘러싼 작은 중국의 가정집 같은 정감이 어린다. 이곳에 베토벤이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집 이름은 내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다시 되살려준다. ‘유서의 집’이다.

베토벤의 피아노를 보니 초등학교 교과서가 생각난다. 아, 베토벤 선생님 아니십니까.

  아직 젊은 나이에 청력을 잃어가던 베토벤은 얼마나 좌절하였을까? 갖은 방법과 온갖 치료를 다하여도 차도는 없었고 도리어 귀는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그 때 베토벤을 치료하던 주치의는 번잡한 빈 시내를 떠나서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권유하였다. 베토벤이 택한 곳은 시내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였으며 온천까지 있어서 요양에 적합한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였다. 1802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32세. 그 어떤 직업에서도 이제 겨우 자신의 일을 처음 시작하려는 나이가 아닌가?

  이곳에 온 베토벤은 이 마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일리겐슈타를 만끽하였다. 집도 좋았지만, 산책을 좋아하던 베토벤은 매일 같이 나가서 숲을 산책하였다. 그곳이 유명한 베토벤의 산책로다. 이곳의 자연은 베토벤을 고무시켰고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럼에도 베토벤은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난청이 더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름다움 자연을 경험하면서 속으로 자신의 귀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음악가. 숲 속을 걸으면 새소리 바람소리 들리지 않고, 대신 그의 귀에는 자신의 멜로디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는 죽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유서를 썼다. 어쩌면 종종 연관되는 불멸의 연인과는 관계가 없었을 것 같다. 자신의 이런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굳이 지나난 연인과의 관계와 연관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를 지지하고 그를 내조하는 여인이 있었다면, 그는 더 견디어냈을지도 모르지만......

  베토벤은 지난 연인에게 유서를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동생들에게만 유서를 썼다. 유서는 모두 두 동생 칼과 요한을 향해 써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완전히 지난 사랑을 단념했던 것이다.

베토벤의 방에서 창으로 내다본 풍경. 너무나 평화롭다.

  이곳은 ‘베토벤 유서의 집’이라고 붙여져 있는데, 일종의 박물관인 셈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방은 베토벤이 유서를 썼던 작은 방이다. 뒤편으로 싱그럽게 푸른 나무가 보이는 작은 창이 있는 좁은 방이다. 많은 상념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온 한 노인이 돋보기를 쓰고 너무나 진지하게 자료들을 읽고 있다.

  

2층의 복도. 아주머니는 저 의자에 종종 앉으시나 보다.

  2층의 다른 방에는 베토벤은 여러 유품들이 보관되고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것들은 복사본이며 어떤 모조품은 조잡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정감이 있다. 베토벤이 살아 있었을 때에도 궁상맞았을 것이다. 그러니 현대적으로 다시 도배된 기념관들보다도 훨씬 정감 있다. “그들의 궁색함이 나를 감동시켰다”는 히라노의 말이 떠오른다. 이곳이 더 이상 새롭게 리노베이션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적어도 다음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는......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당연히 그의 유서다. 그가 쓴 유서들은 비록 복사본이지만 정성껏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것을 본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그 유서들이 여러 통이 써졌지만, 실제로 부쳐진 것은 한 통도 없었다. 부쳐지지 않은 그의 유서들...... 부치지 않은 것들이란 그 모든 것을 다시 삼켜버린 베토벤의 울음이었다.

지금도 인자한 미소로 즐겁게 그 집을 지키고 계실 것이다.

  이곳을 지키는 할머니가 계속 설명을 해 주었다. 너무나 열심히, 그리고 다정하게...... 마치 살아있었던 베토벤을 살펴주지 못한 것을 그가 죽고 없는 지금이라도 그를 살펴주는 듯이,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베토벤에 대한 깊은 정성이 묻어 있었다. 너무나 친절하였다. 여기를 찾아온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는 베토벤을 찾아온 내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내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2층의 전시실을 나올 때 그녀는 내가 요청하는 대로 몇 번이고 사진의 포즈를 취해주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언젠가는 꼭 다시 오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해버렸다.


     베토벤의 산책로. 이 큰 나무는 베토벤과도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나와서 숲을 찾았다. 베토벤의 산책로....... 여기서는 ‘베토벤의 가로수길’이라고 부른다. 베토벤이 걸었던 길을 나도 걷는다. 5월의 빈 숲은 너무나 아름답다. 여기저기 핀 들꽃과 풀들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새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어디선가 초등학교가 있는지 어린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소리들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에 그는 눈으로 코로 손으로만 이 숲을 느꼈던 것이다.

  
  이 숲에는 베토벤이 살았었다는 집이 두 개나 더 있다. 하나는 <합창> 교향곡을 작업하는 동안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실제 <합창>은 바덴에서 완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에로이카 하우스’다. 바로 <영웅> 교향곡을 작곡하였던 집으로서, 영화 <에로이카>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그 옆으로 난 길이 ‘에로이카 가세’다.

  나는 숲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 전원 속에서 그는 귀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교향곡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스스로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고, 비가 떨어지고, 다시 개고, 시냇물이 흐르고, 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들판이 노래했던 것이다. 이 숲에서 그의 <전원> 교향곡이 탄생하였다.


    <전원> 교향곡이 들려올 것만 같지 않나요? 


  있지도 않은 그이를 생각하고 보지도 않은 그이를 그리워하면서 숲을 걸었다. 나는 비로소 그가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러면서도 살았던 그가 참으로 위대했다는 것을 새삼 몸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그를 생각하면서 한참을 걷는다. 그러다보니, 아니, 그가 나타났다. 그의 산책로 가운데에 산책하는 베토벤의 상이 실제 크기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그를 만난 것만 같았다. 석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풍월당  "박종호의 예술노트"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