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디자이너 최윤희 "행복의 비결? 우리 마음속에 있죠" | ||
[세컨드찬스 17 ] "마음가짐이 행복의 열쇠" | ||
[ⓒ '글로벌 종합일간지' 아시아투데이]
행복은 이미 마음속에…. 행복의 비결이 따로 있을까? ‘행복디자이너’ 최윤희씨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열쇠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행복을 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열라는 얘기였다. ‘행복디자이너’로 알려진 최윤희씨(62). 방송출연, 강연 등으로 여전히 바쁜 가운데 인터뷰가 어렵게 이루어졌다. 지난번 연락했을 때는 감기몸살 때문에 어렵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를 11일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는 젊은 펑크들족이 구사할 법한 녹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모습이었다. 남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표현으로 보였다. 최윤희씨는 16년을 전업주부로 살다가 38세의 늦은 나이에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입사, 부국장, 계열 방송의 홍보국장까지 지냈다. 외환위기 때 사직서를 낸 이후 ‘행복디자이너’로 더 유명해졌다. 전국에 ‘행복’을 불어 넣는 강연을 다닌다. 상담메일도 하루에 수십통씩 받고 있다. 그는 지금 만인의 카운슬러가 된 듯하다. 먼저 성장과정이 어땠는지 물었다. ‘행복디자이너’는 지나온 생이 순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어요. 어머니는 아파서 누워 계시고 걷질 못하셨죠.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이었는데 술만 먹으면 헐크로 변했어요. 죽고 싶었죠. 아버지 때문에 괴로워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됐어요. 문학소녀라는 말을 들었는데 행복했다면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삐뚤어지기 쉬운 환경이었고 반항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독립적이 돼서 먹여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중간 정도였어요. 괴로운 것을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통해서 풀었죠. 그게 중요한 인생의 스트레스 해소책이었어요.”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행복을 꿈꿨다. 불우한 성장기에 최윤희씨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책읽기와 쓰기였다.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며 그는 아픈 과거를 그렇게 보듬고 있었다. 1965년 이 문학소녀는 이화여대 국문학과로 진학을 한다. “집이 가난하니까 아버지는 대학도 안 보내려고 했어요. 당시 여자들은 안 가르치는 분위기였죠. 엄마가 여자도 배워야 된다면서 쌈짓돈을 꺼내 줬어요. 시험 보러 가라고 떠밀었죠. 합격을 했지만 돈이 없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초등학교 아이들을 개인, 그룹별로 모아 가르치며 학비를 벌어서 다녔어요. 글을 쓰다보니까 교지 편집장이 됐어요. 코리아헤럴드에서 각 대학 편집자들이 모여 교지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남편을 만나 연애결혼을 했어요.” 당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진해의 언니 집으로 가서 결혼을 했다. “최악의 조건을 갖춘 남자와 결혼을 했어요. 남편은 집안도 가난했고 형제도 많고 야간대학을 나왔어요. 직장도 박봉이고 나이차도 많이 나 모두 반대했죠. 사랑 하나에 눈이 멀었었어요.” 그렇게 결혼을 하고 취직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의 사회생활이 활발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의 책읽기는 계속 됐다. “주부 때에도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어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빵공장, 신문사에 견학을 다니곤 했죠.”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한 주부의 길이 계속되나 싶었지만 이내 시련이 닥쳤다. “결혼한 지 8년 만에 산동네에 10평 아파트를 갖게 됐어요. 남편이 집을 잡히고 사업을 하다 망해서 부산으로 가야 했죠.” 하루아침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 일부러 연고가 없는 지방을 택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보험을 해약한 돈이 전부였다. “참담한 정도가 아니라 절망의 꼭짓점이었어요. 단돈 70만원을 들고 가는데 살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인간이라는 게 팔다리가 잘려도 살아야 했어요. 1년 동안문간방에서 지냈어요.” 서울에 다시 올라와 취업공고를 보고 입사지원서를 냈다. 창작 동화를 자기소개서에 적고 특기는 ‘멍하게 하늘 쳐다보기/바람 맞으며 무작정 걷기’, 취미는 ‘인상 쓰고 있는 사람 간지럼 피우기’라고 적는 등 독특한 내용으로 점수를 받았다. 1300대 1의 경쟁을 뚫고 광고회사에 합격을 한 그 때 나이가 38세였다. 하지만 회사 상사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울 리 없었다. “죽기 살기로 했어요. 열심히 하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당시만 해도 여직원에 대한 차별이 많았죠. 여직원은 직장의 화초가 되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어요. 그걸 다 뒤집어 버렸어요. 화초가 아니라 약초가 되어야 한다고…. 미인도 아니고 나이 많은 아줌마라는 것 등 약점을 갖출 데로 다 갖추고 있지만 이걸 장점으로 바꿔버렸어요.” 그러다보니 그를 바라보는 상사들의 태도도 점차 바뀌었다. “젊은 남자 상사가 나를 쫓아내려고 기를 썼었지만 나중에는 못 나가게 했어요. 그렇게 바꾸고 변화시켰어요. 일을 잘 해서라기보다는 성실·진실 ‘실자매’와 동거했기 때문이었죠.”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눴다. 함께 울고 웃으면서 그의 진심이 받아들여졌다. “광고의 광자도 모르고 카피라이터가 됐어요. 하지만 던져 놓으면 쓰러져 버리는 사람이 있고 이겨내는 사람이 있어요. 박태환도 천식을 극복하려고 수영을 했다고 하잖아요. 악조건을 극복해서 강점으로 바꾸는 사람이 있어요. 그냥 무너지기에는 자존심 상했죠.” 당시 광고사에 유부녀가 거의 없었던 시절에 그는 남자 동료들보다 진급이 빨랐다. 특진도 여러 차례 했다. 그렇게 해서 회사 간부까지 올랐다. 간부 시절의 그는 어땠을까? “굉장히 특이했어요. 지금도 직원들이 그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해요. 아침 회의를 하면 5분만 일 얘기를 하게 했어요. 나머지는 퇴근 후에 뭘 했는지 얘기하게 했죠. 윤락가에 갔다는 얘기까지 하면서 사생활, 집안 이야기를 다 했어요. 그러니 가족처럼 친해졌죠. 회식도 밥 먹고 술 마시고 그게 정규 코스였지만 다음날 일에 지장을 주니까 다르게 했어요. 극장에 가서 흩어져 보고 싶은 영화를 보라고 하고 다시 만나 맥주 한 잔 했죠. 집에 갈 때는 남은 회식비로 선물의 집에 들렀어요. 밑의 직원에게 제일 큰 선물을 줬어요. 영화 보고 선물까지 안고 집에 가니 모두 좋아했어요. 가족처럼 그렇게 지냈죠. 모두 그때를 그리워해요.” 그러다 외환위기를 맞았다. 먼저 사표를 냈다. 자신의 월급으로 3명은 더 고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직 후에도 그의 글쓰기는 계속 됐다. 책을 썼는데 반향이 컸다. 덕분에 방송출연도 하게 됐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강연 요청이 쏟아졌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행복디자이너’로 불리게 됐다. 최윤희씨는 행복의 기준을 돈, 사회적 성공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그는 충고한다. 세상의 단순한 잣대와 시선에 따르기보다 자신의 만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행복의 비결이요? 따로 없어요. 내가 만들어야지요. 마음속에 이미 행복이 있어요.” <이한선 기자 griffin@asiatoday.co.kr> {ⓒ '글로벌 종합일간지' 아시아투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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