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트파르크
내 어린 시절에만 하여도 유럽의 풍물이나 인물들을 볼 수 있는 사진이라는 것이 귀한 시절이었다. 특히 음악가들의 사진은 드물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듯이 베토벤이나 바흐, 또는 슈베르트나 모차르트 등의 사진들이 생기면, 거실이나 피아노 방 같은 데에 걸어놓기도 하였다. 또한 음악 감상실이나 다방 같은 데에도 걸어놓아서, 나는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렇게 이런 저런 사진에서 보아왔던 음악과 관련된 여러 사진들 가운데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의 하나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상이었다. 우리나라에 청동상조차도 귀하던 시절에 그 사진은 나에게는 충격적이고 너무 화려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당시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동상이라는 것이 기껏 해봐야 용두산 공원에 있는 시커멓고 둔탁하기 그지없게 느껴지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 정도였는데, 사진 속의 슈트라우스는 날렵한 몸매에 마치 살아 움직이듯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게다가 전신은 황금으로 싸여져 있으니, 그것인 정말 황금인지 도금인지조차 알 길도 없는 어린 나에게는 다만 저 서편 하늘 어딘가에 있을 먼 나라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금상 주변을 둘러싼 하얀 아치와 그 아래에 조성된 오색의 꽃송이들은, 그야말로 내가 듣던 슈트라우스 왈츠의 그 우아하고 화려하고 그러면서도 신나던 그 감상(感傷) 그대로였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폴카들이 너무나 좋았고, 그 선율들은 늘 듣고 있던 나의 혼을 빼놓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는 책에서는 “베토벤이나 브람스 아니면 바흐 같은 것들이 수준 있는 고전이며,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란 그리 가치가 높은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역시 슈트라우스 왈츠가 마음에 드는 나란 아이는 얄팍하고 표피적이며 노는 거나 좋아하고 수준 낮은 사람인가 보다”하며 덜컥 겁이 나서, 슈트라우스를 마음껏 사랑하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사진에서 보는 슈트라우스. 그렇다!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지 않은가? 내가 여러 사진에서 찾아본 바로는 빈에 있는 그 어떤 음악가의 상도 황금으로 전신을 다 휘두른 것은 없었다. 그렇다. 슈트라우스도 실은 빈에서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황금 슈트라우스’를 나는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황금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 슈트라우스의 왈츠에도 이전처럼 흥분하지 않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 나이에서야 나는 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설레며 보아왔던 그 슈트라우스의 황금상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상이 있는 곳은 ‘슈타트파르크’ 즉 ‘시립 공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은 빈에서 링 슈트라세를 건설할 때 함께 조성된 계획적인 공원이다. 링 슈트라세의 한 켠에 있는 제법 넓은 땅으로 이루어진 이 공원은 부르크 가든(궁정 정원)이나 폴크스 가든(시민 정원) 등을 제치고 링 주변으로 둘러싸인 빈 시내에서 가장 큰 공원이 되었다. (물론 더 외곽에는 ‘프라터’라는 훨씬 더 큰 공원이 있기는 하다.)
1862년에 링 슈트라세의 동편을 따라서 있는 도나우 운하의 지류를 가운데에 두고 링을 따라서 길처럼 좁고 길게 공원이 조성되었다. 영국 스타일의 정원으로서 꽃밭, 잔디밭 등이 있고 연못에는 오리들이 놀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봄과 여름에 왈츠를 직접 추거나 감상할 수 있는 무도장 겸 야외 음악당도 있다. 게다가 이 슈타츠파르크는 그 아름다운 문을 오토 바그너가 디자인한 것으로 문은 건축학적인 가치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슈타츠파르크의 최고의 것은 정원도 문도 무도장도 아니라, 동상들이다. 물론 나는 맨 먼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찾는다. 어릴 때부터 흠모하던 슈트라우스 아니 그의 동상 아니 실은 황금상은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눈부신 황금을 두르고 여전치 세련된 포즈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물론 그와의 첫 해후는 감격적이었다. 이곳에는 늘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진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이 슈트라우스 상은 공원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1년에 조각가 에드워드 헬머가 만든 것으로 당시 슈트라우스를 좋아하는 시민단체에서 뜻을 모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슈타츠파르트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슈타츠파르크에 인접한 두 개의 호텔에서 각기 묶은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가장 좋은 점은 늘 공원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원을 걷는다. 뛰기도 하고 좀 빨리 걷기도 하지만, 늘 공원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걸음은 느려지기 일쑤다. 물론 오후나 저녁에 호텔로 돌아올 때도 일부러 공원으로 들어가서 걷다가 호텔로 돌아오곤 하였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당시 공원의 찬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아침 일찍 안개 속에서 유영(遊泳)하는 오리들을 만나기도 하고, 나처럼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도 만난다. 새벽에 혼자 나온 할아버지가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공원의 공기를 음미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할머니는 매일 같은 장소에 서서 오리들에게 모이를 주기도 한다. 마치 가족 같다......
그러나 더욱 반가운 것은 공원의 숲 속에서 나타나는 음악가들일 것이다. 당연히 요한 슈트라우스는 무도회장에서 가장 중요한 3거리에 자리 잡고 서있으면서 무도회장에서 오늘도 자신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가슴 뿌듯이 듣고 있다. 그런 그는 늘 밝은 곳에서 먼저 눈에 뜨이지만, 그 외의 다른 음악가들은 마치 그들 속의 음악처럼 공원 안에 수줍게 숨어있다.
공원들 돌다보면 커다란 개암나무 밑에 슈베르트 선생님이 앉아 있다. 바로 우리가 오랫동안 보아왔던 앉아있는 슈베르트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앉은 슈베르트는 그 특유의 동그란 안경을 낀 채로 한 손에 악보를 들고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다. 좀 비만한 그의 몸은 역시 앉아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늘 바이올린을 들고 서 있는 슈트라우스의 날씬한 허리를 우리의 진지한 작곡가는 흉내 낼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제 슈베르트 선생님이 더 좋다. 나도 나이가 든 게다. 슈베르트가 앉아 있는 기단의 네 면에는 각기 합창곡, 기악곡, 환상곡 등 슈베르트의 음악세계를 묘사한 부조들이 장식되어 있다. 슈베르트의 상은 1872년 빈 남성 합창단이 세운 것으로, 조각가 쿤드만의 작품이다.
알만하고 또한 알 수도 없는 여러 위인들인 숲 속에 있지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브루크너의 동상일 것이다. 고향을 떠나서 이곳 빈으로 이주하여 참으로 노력에 노력을 경주하여 가장 완성된 형태의 교향곡을 위해서 일생을 다 바친 진지한 예술가. 그의 동상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일부러 찾아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진가를 보여주지 않는다. 숲 속에서 역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부르크너의 반신상은 그의 모습도 진지하고 숭고하여 훌륭하게 되었지만, 기단이 더욱 화려하다. 기단에는 리라를 든 음악의 요정이 브루크너의 작품 세계를 추앙하듯이 두 팔을 크게 벌려서 위대한 음악가를 받들고 있다. 인상적인 이 동상은 1899년 조각가 튈트너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얼마전에 기단부가 바뀌어서 사진처럼 단순것으로 대체되었다.
슈타르파르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바그너가 만든 문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인근에 베토벤 플라츠라고 하는 작은 공원이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이 베토벤의 동상이다. 역시 우리가 사진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그의 익숙한 좌상(坐像)인데, 역시 직접 만나보면 감회가 새롭다. 기단에는 베토벤의 세계를 나타내듯이 프로메테우스와 그리스의 천사들의 모습이 많이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줌부쉬의 작품으로서 1880년 베토벤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여 여기에 세워졌다.
슈타트파르크와 그 주변의 모든 동상들은 꼭 자신의 성격에 맞는 장소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깐깐한 베토벤은 다른 음악가들과 함께 있기 싫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자신을 올려다볼 길가에 있고...... 모두가 기막히다. 이곳에서 그들은 함께 하지만 다들 각자 자신의 향기를 내고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늘 그리게 되는 그리운 공원이 아닐 수 없다. 빈에 가면 매일 아침 이곳을 걷고, 빈을 떠나면 매일 아침 걸으면서 그곳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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