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14일, 프랑스에서 145년 만에 돌아온 조선왕실 외규장각 의궤(사진). 수백 년의 세월에도 갓 뽑아낸 듯 바래지 않고 선명한 색상에 전 국민이 놀라던 기억이 새롭다. 프랑스의 보존기술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지만 진짜 비결은 ‘견(絹) 오백 지(紙) 천년’, 즉 천년을 가는 우리 한지에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 통일신라시대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으로 인정받은 만큼 기록유산으로서 한지의 품질은 독보적이다.
![]() |
한지의 우수성은 질 좋은 닥나무에 깨끗한 물이라는 자연 요소와 우리 선조만의 과학적 제조법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한지 원료인 1년생 닥나무는 리그닌이라는 물질이 적당히 들어 있어 섬유가 딱딱해지지 않고 변색하지 않는다. 섬유 길이도 침엽수 펄프 원료보다 세 배 이상 길다. 닥을 삶을 때 넣는 잿물은 짚·메밀대 등을 태워 만든 것으로, 화학약품에 비해 자연스럽게 섬유를 분리해 낸다. 종이를 뜰 때 황촉규로 만든 풀을 푸는데, 섬유 엉킴을 막고 알칼리성이던 닥섬유를 중성으로 만든다.한지의 품질을 결정짓는 핵심은 우리만의 외발뜨기다. 중국의 선지나 일본의 화지는 쌍발뜨기로 종이에 방향성이 생겨 잘 찢어진다. 하지만 외발뜨기 한지를 확대해 보면 섬유가 직교하면서 서로 얽혀 훨씬 질겨진 것을 알 수 있다. 99번 손이 간다는 한지 공정의 마지막은 다듬이나 디딜방아로 두드리기. 종이를 치밀하고 매끈하게 만들어 더욱 강도를 높인다.
이 명품 한지가 중국산 화선지 등 싸구려 종이의 습격에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까지 전국에 100곳이 넘었던 한지공방은 이제 24곳만 명맥을 잇고 있다. 보존력, 통풍성, 항균성이 가장 뛰어난 종이임에도 세계시장에서 한지의 위상이 전혀 없는 이유다.
![]() |
현재 한국 공예·디자인 문화진흥원은 재료와 제조 방식, 첨가물에 따라 한지를 100여 종으로 분류하고 등급을 매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화지가 등급을 세분화해 분야별로 활용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다양한 수요 창출을 위해 지난해 제1회 한지상품개발 디자인 토너먼트 대회를 열기도 했다.
|
“달밤에 창호문은 안과 밖을 비추는 스크린이었다. 부인은 등잔불 앞에서 물레질을 한다. 골목길을 들어서는 남편의 시선을 의식하며 여러 번 자세를 가다듬는다. 부인은 때로 등잔불의 조도를 낮춰 달빛을 받고 들어서는 남편의 모습을 먼저 보기도 했다. 이렇듯 스크린 역할을 했던 창호는 서로의 마음을 비추고 상상해 내는 그림자 극장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2011)에서 정의한 한지의 미학이다. 우윳빛 창호지 너머로 따스한 불빛이 은은히 퍼지면서 건너편의 실루엣을 또렷이 드러내는, 비추면서도 가리는 은근함의 정서다.
한옥을 감싸며 우리 정서를 지탱해 온 한지는 공기 중 유해한 성분을 흡착하는 친환경적 기능성까지 갖춘 고급 마감재다. 차가우면서 따뜻한 정감이 배어나는 독특한 미감은 고급스러우면서 대중적이고, 예스러우면서도 모던한 공간감을 구현하는 데 제격이다. 전통 한지공방 장지방이 선보인 옻칠을 적용한 아트월은 공간을 꾸미는 한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80년대부터 압구정동, 청담동 일대 상업공간 200여 곳을 새로 꾸미며 첨단 트렌드를 이끌어 온 공간 디자이너 마영범은 한지의 미학을 모던한 공간 속에 풀어낸 대표주자다. 90년대 한복디자이너 이영희 매장부터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해 지금은 없어진 카페 ‘느리게걷기’, 한정식집 ‘우리가’ 등 그가 손댄 공간에는 언뜻 한지로 보이지 않는 한지가 두루 사용돼 왔다. 그가 말하는 한지의 미학은 ‘수용성’. 자기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지만 굉장한 포용력으로 빛은 물론 주변의 모든 환경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인사동의 오설록 티하우스는 마영범 한지 공간디렉팅의 정수다. 먹물, 커피 등으로 직접 가공한 한지와 장지를 바른 벽에 간접조명을 비춰 은연중 한지의 멋을 드러낸다. 층마다 종이 재질감을 달리해 한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망라했다. 1층은 한지를 오브제로 사용한 벽 장식과 창살문을 투과하는 조명으로 현대적이고 전통적인 공간감이 교차하게 했다. 2층 카페 공간은 천연 염색한 한지를 일정 크기의 나무합판에 감아 마루 깔듯이 벽에 붙여 다양한 패턴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순수한 느낌의 공간을 완성했다. 마영범 작가는 “한지 수요를 일으키려면 성급하게 한지로 뭔가를 만들어내려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벽지로 이용해 은연중에 그 멋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용자가 한지의 물성과 우수성을 깨닫는 시점이 되면 수요는 폭발할 것”이라고 말한다.
비추면서 가리고, 모든 것을 머금는 한지의 미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아이템은 조명이다. 닥종이를 투과해 나오는 빛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독일의 저명한 조명 디자이너 잉고 마우어(Ingo Maurer)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서울리빙디자인페어 광주요 부스에서는 불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한지 조명으로 조형작업을 하는 김재성 작가의 작품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빛이 직접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갓을 씌운 형태로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동양화의 미다. 또 한지는 유리나 다른 소재의 조명에 비해 원하는 형태를 디테일하게 구현할 수 있다. 전통의 조명을 어떻게 현대적 형태로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다.”
가볍고 질긴 데다 항균성 갖춘 한지 섬유
한지의 우수성은 한지사로 만든 의류 개발에서 발휘되고 있다. 항균성·소취성·통풍성·원적외선 방사라는 우수한 기능성이 의류에 그대로 적용된다. 한지 섬유는 한지를 얇게 잘라 꼬아 만든 한지 실을 면, 실크 등 다른 섬유와 섞어 만든 직물이다. 세탁이 불가능하고 잘 찢어질 것 같지만, 형태 안정성 및 내구성이 다른 소재보다 오히려 우수하다. 또 곰팡이 및 유해 세균 발생을 방지하는 항균성이 있어 땀을 흘려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무게도 일반 면사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매우 가볍다.
2004년부터 한지사를 개발한 쌍영방적 김강훈 대표는 “한지 섬유는 세계에서 가장 가볍고 인체에 이로우며 매립 시 생분해도 잘 되는 친환경 패션 소재”라고 말한다.
이런 기능성에 입각해 그간 속옷, 양말, 유아용품 등에 사용돼 온 한지사는 최근에는 패션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2009년 패션학교 에스모드 서울은 세계 14개국 분교에 한지사 섬유를 보내 학생들에게 한지사의 특성을 살려 디자인하게 한 ‘한지사, 세계를 입다’ 행사를 했다. 한지 섬유를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표현해 실용화에 한걸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세계에 알린 셈이다.
여성복 브랜드 ‘TROA’의 디자이너 한송은 모든 디자인에 한지를 적용해 제품화에 성공했다. 2003년 파리 오트 쿠튀르 참가 당시 세계시장에서 소재의 차별성 없이는 경쟁력이 없음을 깨닫고 소재 디자인에 매진한 결과다. 그는 친환경이 민감한 이슈인 유럽 시장에서 한지와 천연 염색 콤비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지 섬유는 면보다 색상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좋고 면과 실크 중간 느낌의 독특한 미감을 발휘한다. 8년 동안 원단을 개발한 그는 이제 동양적인 감성이 배어 있는 모던한 디자인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특히 한지사를 이용한 프리미엄 진은 전혀 새로운 소재와 색감, 디자인으로 세계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지 섬유에 라이크라 등을 혼방한 원단은 기존 데님보다 가볍고 상쾌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을 구현했다. 천연 염색으로 한국 고유의 쪽에서 뽑아낸 깊이 있는 청색, 먹에서 얻어진 그윽한 회색의 모던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살렸다. 현재 현대백화점 5개 매장에서 판매 중이고, 지난해 영국 해러즈 백화점에서 한 달간 전시하며 좋은 반응을 얻은 데 이어 올 4월에는 뉴욕 맨해튼의 최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 입점 예정이다.
한송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한지 섬유는 가죽의 고급스러운 느낌을 낼 수도, 그 위에 구겨진 듯한 자연스러운 모던함을 더할 수도 있다. 잇세이 미야케의 ‘PLEATS PLEATS’가 전통적인 섬유제조법을 가공한 소재 차별성으로 명품 반열에 오른 것처럼 한지 섬유를 이용한 원단 디자인의 노하우로 승부하고 있다. 단 디자인은 모던한 컨셉트로 가야 한다. 너무 에스닉한 것은 잠깐의 흥미에 그칠 뿐이다. 해외시장에서 트렌드 리더들에게 최고급으로 인정받으면 대중에게 뻗어나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더 다양한 쓰임새를 위하여
한국 공예·디자인 문화진흥원은 한지 상품 개발 디자인 토너먼트 등 지원사업을 통해 정책적으로 한지를 미래의 글로벌 문화상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산파 역할을 하고 있다. 한지의 본질적 속성과 아름다움을 되묻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탄생한 디자인 제품들은 지난 1월 파리의 디자인박람회 ‘메종 앤 오브제’에 출품돼 좋은 반응을 얻었다.
토너먼트 대상 작품인 ‘로스’의 스니커즈와 보자기 가방, 신발 깔창은 한지의 소재적 특성을 잘 살린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한지사 원단을 이용해 만든 스니커즈는 고무신의 부드러운 곡선과 한복 깃의 겹침을 모티브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한지사 원단의 다용도 보자기 가방은 물건을 포장하는 본래의 용도는 물론 가벼운 숄더백, 돗자리 등으로 활용 가능하다. 신발 깔창은 한지의 탁월한 흡습성과 냄새 제거 효과가 뛰어나 맨발이어도 상쾌하게 신을 수 있다. 멘토디자이너 조명희의 가방도 가볍고 질긴 한지의 속성과 공예의 느낌, 자개와 색동 등 민속적인 모티프들을 결합한 형태를 선보였다.
가장 전통적인 재료로 가장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는 것. 예스러운 것과 한국적인 것을 구별해 오늘의 시대정신이 담긴 진짜 한국의 미를 규정해야 할 모든 디자이너에게 부여된 숙제다.
한지 만드는 과정
1. 주로 1년생 닥나무를 12월 말에서 3월 말까지 채취한다. 이 시기에 채취한 닥은 섬유질이 풍부하고 수분도 적당히 함유하고 있다. 채취한 닥나무를 가마솥에 넣고 수증기로 쪄 껍질을 벗긴 다음 말린다. 이렇게 건조된 닥나무 껍질을 피닥이라 한다.
2. 피닥을 장시간 물에 담가 불린 후 칼로 겉껍질을 긁어내 하얀 속껍질만 남은 백닥을 만든다. 백닥을 잿물에 충분히 삶고 물로 헹굼과 햇볕 쬐기를 반복하며 표백한다.
3. 백닥에 남아 있는 불순물 등을 제거하는 티고르기 작업을 마친 후 넓은 돌판 위에 닥을 올려놓고 나무 방망이로 닥섬유가 뭉개져 죽이 될 때까지 두드린다.
4. 닥죽을 깨끗한 물에 담그고 황촉규 점액과 고루 섞이도록 저은 후 발틀에 발을 얹어 종이를 뜬다. 이때 앞 물질과 옆 물질을 하여 종이를 고르게 뜨는 것이 중요하다.
5. 발로 건진 종이는 차례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널빤지와 무거운 돌을 올려 천천히 물을 뺀다. 물을 뺀 종이는 한 장씩 떼서 열판에 붙여 건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