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이런 말을 했다.
'서양학문은 결국 플라톤의 각주(脚註·Footnote)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양지성사의 '블랙홀' 같은 존재. 서양학의 출발역과 종착역은 결국 두 철인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인문·사회·자연과학도 둘의 학문적 자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플라톤의 '국가론'의 논리적 구성력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처럼 천의무봉하다. 정의(正義)를 중심으로 발전적 대립각을 보이고 있는 여러 계층의 인간이 어떤 양상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를 '모세의 십계명'처럼 제시해놓았다. 그는 시민사회의 인간을 이성·욕구·의지그룹으로 3등분하고, 각각에 통치자·생산자·군인을 매치시켰다. 물론 이 세 그룹의 주요 덕목은 지혜·절제·용기.
특인 철인 통치자는 무려 15년간 엄격한 훈련을 받도록 했다. 첫 10년간은 정확한 과학인 산수·평면기하학·입체기하학·천문학·화성학, 그 다음 5년간은 '변증술(Dialektike)'을 익히게 했다.
1980년 계명대 ROTC학군단에서 회지를 내기 위해 계명대의 한 교육철학자에게 원고청탁을 했다. 세상은 바야흐로 광주사태의 회오리속으로 빨려들던 때. 당시 가장 파워 있는 집단은 군부였다. 평소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깊은 감화를 받았고 마침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고심 중이던 그 철학자는 결심한듯 신군부를 향해 하고 싶은 속말을 조율없이 그대로 쏟아낸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따르면 훌륭한 군인은 혈통이 좋은 개여야 한다고 했다. 좋은 개는 주인에게는 온순, 낯선자에게는 사납게 굴어야 된다. 그런데 현재 개는 그렇지 않고 국민에게는 사납게 굴고 낯선자에게 오히려 굽신거리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주인이 과연 이런 개를 살려둘 필요가 있겠는가.'
그 글을 본 연대장이 즉각 이 사실을 중앙정보부에 알렸고 곧바로 신일희 총장이 기관에 불려간다. 끝내 그 지식인은 재계약 때 해직된다. 2년10개월간이었지만 교수집단으로부터 완전 고립된 처지에서 유배의 나날을 보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내일자로 계명대 교육학과를 정년퇴직하는 교육학과 신득렬 교수. 그는 제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관행으로 돼 있던 명예교수 대신 '은퇴교수'란 직함을 원했다. 지난 1월15일 일찌감치 학교로 가서 짐을 샀다. 계명대 영암관 326호, 연구실에 있는 장서를 선별, 팔공산 파계사 초입에 있는 개인서재를 겸한 북카페 파이데이아(paideia)로 옮겼다. 파이데이아(www.paideia.or.kr)는 3월1일 문을 연다. '독서아카데미' 같은 북카페에서 인생 2부의 첫페이지를 펼치는 신 교수를 만나 '대한민국 교육이 갈 길'을 알아봤다.
- 뵙기에는 참으로 유하신 분 같은데 어떻게 서슬 퍼렇던 80년 군부독재 시절, 군인을 개로 비유할 수 있었습니까.
"그건 제 말이 아니고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한 건데…. 만약 제가 그냥 유명해지고 출세하려고 했다면 그때 절대 그런 말을 못했을 겁니다. 저는 교육철학자였습니다. 뭐가 잘못된 걸 뻔하게 알면서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할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 아는 교수들도 동정을 하고 싶어도 대놓고 두둔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저와 접촉하면 그 교수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찍혀 고초를 겪어야 할 게 뻔하니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정황이었어요. 다행히 영남·대구대에서 강사 자리를 줘 겨우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때는 먹고 살 걸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그러나 맘은 한없이 편했어요. 혼자 사색할 시간이 많고해서 존듀이의 주저 '경험과 자연'을 번역했습니다."
- 어떻게 교육철학자의 길을 걷게 됐나요.
"대학 시절 교육철학자 박봉목 교수로부터 플라톤의 국가론을 배웠어요. 그 교수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아 한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다수 교사의 길을 갔지만 저는 먹고사는 것보다 뭐가 바른 길인지 더 파고들었습니다. 성균관대학원에서 존듀이 연구의 국내 1인자인 임한영 교수 밑에서 6년 있었습니다."
- 교수님께서 지역에 준 가장 값진 선물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위대한 저서 읽기 운동'이라 봅니다. 사실 상당수 교수들도 위대한 저서의 저자와 제목 정도만 알지 거의 정독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얘기를 하기 전, 미국의 대표적 교육철학자인 허친스(Hutchins)와 아들러(Adler)의 업적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둘은 1930년부터 미국의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위대한 저서 읽기 프로그램'을 시행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학자와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1952년 모두 54권으로 된 서양의 위대한 저서(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전집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회사를 통해 출간합니다. 권수로는 443권, 저자만 74명입니다. BC 8∼20세기까지 명저가 인문·사회·자연과학별로 골고루 선정됐죠. 저도 그 흐름을 한국에 끌어 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91년 11월 비영리기관인 파이데이아 아카데미를 개소했습니다. 저희들은 인문·사회과학 저서만 다룹니다."
- 책은 어떤 방식으로 읽죠.
"파이데이아는 그리스어로 '교육학습'이란 뜻으로 플라톤이 만든 최초의 학교 이름이죠. 현재 70여명의 회원이 있는데 1주일에 한번 북카페에 나와서 고강도 독서토론을 벌입니다. 다른 독서회와 달리 저희들은 구체적인 커리큘럼을 갖고 있습니다. 매주 해당 책을 50~70쪽 읽고와야 됩니다. 현재 1학년부터 7학년 과정까지 있습니다. 각 학년은 한해 평균 7권 정도 통독하게 됩니다. 맨처음 읽는 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마지막에 읽을 책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입니다. 매주 화요일은 3학년, 목요일은 6학년, 토요일은 1·2·4학년이 참석하죠."
기자가 도착했을 때 북카페 2층에선 5학년 과정에 있는 회원 15명이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회원들은 지적인 호기심과 함께 쌍방향 토론에 익숙해진 듯 자기 의견을 수시로 피력했다. 목조 테라스를 끼고 앉은 두 벽은 온통 통유리창으로 치장돼 있어 팔공산 연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신 교수는 퇴직금 등 사재와 은행 빚을 안고 어렵사리 북카페를 마련했다. 종일 한 자리에서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어 광량(光量)이 풍부했다. 특히 지적욕구가 있는 이는 다식이 따라나오는 4천원짜리 커피 한 잔 들고 창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종일 보내도 좋을 듯 싶었다. 회원 가운데 앉은 신 교수는 주요 대목에 대한 배경 지식을 꼼꼼하게 알려줬다. 회원의 직업도 다양했다. 교수도 있고, 간호사인 분도 있고 대학생도 있었다. 미담사례가 있다. 올해 69세 된 할머니 회원, 법조인인 그녀의 남동생이 누님의 집 책꽂이에 꽂힌 위대한 저서 곳곳에 메모한 흔적이 있는 걸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남동생은 그날부터 누나가 돌아가는 날까지 장학금 겸 용돈으로 매달 100만원을 송금한단다.
- 여기 회원들은 두 종류의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허허허, 사실이에요. 한국어도 상황별 여러 종류가 있죠. 파이데이아의 일원이 되는 순간 고급적 학술용어에 익숙해집니다. 고담준론이 어울리죠.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가서 그런 묵직한 용어를 사용하면 자칫 왕따 취급을 받을 수 있죠. 그래서 사적인 모임에서는 '우스개 화법'을 사용합니다."
- 위대한 고전이라 하지 않고 왜 위대한 저서라고 했죠.
"참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들이 읽는 책은 모두 현대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에 머물면 고전적 성격이 짙겠지만 현대와 교유하니 고전이란 용어 대신 위대한 저서라고 합니다. 또한 한번 읽고나면 흥미가 사라지는 일과성 책은 위대한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주는 인류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야만 읽죠."
- 이제 국내 교육의 현실에 대해 쓴소리를 들어볼 대목입니다. 지금 학부모들, 자기 자식 명문대 보내는데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학생~교사~학부모~교육당국, 모든 교육 주체가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는 게 지상 목표입니다. 교육철학자로 이런 현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만.
"저는 지금 한국에는 '교육'이란 단어가 없다고 봅니다. 그냥 대학과 직장가도록 만드는 '훈련'만 존재합니다. 교사와 교수는 그 일을 담당한 '트레이너' 같은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교육이 권위가 없죠. 현재 국내의 교육제도는 자업자득입니다. 요런 땅덩이에 4천800만이 살고 있다는 것, 자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출세욕은 당연한거죠."
- 학부모들도 오직 좋은 대학 타령밖에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선진 교육 현장을 보면 우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곳 학부모는 절대 교사를 만나 자기 아이를 이런저런 대학에 보내달라고 주장하지 않아요. 그들이 우리 학부모를 보면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고 욕할 겁니다. 예전 우리 학부모는 교사를 만나면 우리 아이 사람 좀 만들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발 1등하게 만들어 달라고 압력넣습니다. 교육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양교육, 또 하나는 직업교육. 물론 둘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우리는 직업교육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파이데이아는 직업교육보다 교양교육 우선입니다. 그래서 논술강좌도 하지 않습니다. 향후 청소년 독서아카데미아도 활성화시킬 계획입니다."
- 조선의 선비는 너무 문약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의 선비는 교양에만 올인하고 실용을 멀리하는 바람에 일제한테 나라를 뺏겨버렸잖아요."
- 교양부재에서 사회로 나가면 후유증이 심각할텐데요.
"그럼, 앞뒤 안가리고 마구 일을 저지르게 되죠. 자연 학연·혈연·지연이 득세를 하게 됩니다. 저는 그걸 우려하는 겁니다."
-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말 하면 좋은 점수 못받을텐데요.
"대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대뜸 우선 직장부터 갖고나서 다음에 사람되는 공부를 할거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런 자가 나중에 사람공부에 전념하는 걸 보지 못 했어요."
-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람이 된 겁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인 덕(호기심, 의문, 정확하고자 하는 맘)과 도덕적인 덕(우정, 절제, 관후 등)을 고루 갖추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된 거라고 봅니다."
#신득렬 교수는
1944년 성주 출생.
계명대 사범대 교육학과를 졸업, 1976년 성균관대 교육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해 계명대 전임강사에 임명되지만 신군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명대 ROTC 회보에 게재, 결국 82년 해직, 84년 복직된다. 88~93년 한국교육철학회장을 역임하고 91년부터 국내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저서 읽기 프로그램' 보급을 위해 교양교육기관인 '파이데이아 연구소'를 개소. 97년부터 현재까지 계명대 교수협의회 의장을 맡아왔고 2002년 '위대한 대화: 허친스 연구(계명대 출판부)'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에 선정된다. 지금까지 54편의 논문과 11권의 저서, 4권의 역서를 펴냈다.
오는 3월1일 동구 파계사 초입에 '위대한 저서'를 읽을 수 있는 독서아카데미 성격의 파이데이아 북카페(사진)를 오픈한다. (053)982-7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