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대 -- 신경림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 갈대 -- 구재기 **
나는
세상을 향해
적당히 미치려 하는데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꼿꼿이 서라고만 한다 *
** 갈대 -- 이정록 **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 붓은 일 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 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一筆도 없이 揮之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
** 갈대 -- 용혜원 **
나에겐 당신의 열손가락에
붙잡힐 사랑이 없습니다
당신은 갈망하는 눈으로 쳐다보지만
나는 미친듯이 들판을 헤매이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온몸을 날리며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소리가
신음처럼 들리는 나의 고통이
그대에게 무슨 사랑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붉은 노을 속에 불지르고 싶은 몸짓밖에
남은 것은 없습니다
** 갈대 -- 용혜원 **
그대와 마주 설 날이 다시 온다면
사정없이 밀려오던
모든 그리움을 다 떨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홀로 서서 몸부림치며
기다린 세월이 너무나 외로웠는데
그대는 감정마저 무디어져
가벼운 목례만 남기고
떠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가슴에 묻어둔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이 옳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다
모든 걸 다 잃어버렸는데
그대가 외면한다면
기다리던 내 마음은 이 가을에
한없이 흐느낍니다
찬바람이 불어오면
더 외롭게 몸부림칩니다
** 갈대 -- 정호승 **
내가 아직도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서 물결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는
죽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일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 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에 햇살이 빛나기 때문이다 *
** 갈대 -- 천상병 **
환한 달빛 달래며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 갈대 -- 나호열 **
힘을 주면 부러지기 쉽고
너무 힘을 빼면
영영 쓰러져 버린다
광막한 도회지의 한복판에서
다만 흔들리고 있을 뿐인
늪 속에 발목을 묻은
사람들이여!
** 갈대 -- 김춘수 **
1.
너는 슬픔의 따님인가 부다
너의 두 눈은 눈물에 어리어 너의 시야(視野)는 흐리고 어둡다
너는 맹목(盲目)이다. 면(免)할 수 없는 이 영겁(永劫)의 박모(薄暮)를 전후좌우(前後左右)로 몸을 흔들어 천치(天痴)처럼 울고 섰는 너
고개 다수굿이 오직 느낄 수 있는 것, 저 가슴에 파고드는 바람과 바다의 흐느낌이 있을 뿐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
2.
어둡고 답답한 혼돈(混沌)을 열고 네가 탄생(誕生)하던 처음인 그날 우러러 한 눈은 하늘의 무한(無限)을 느끼고 굽어 한 눈은 끝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를 보았다
푸른 하늘의 무한(無限)
헤아릴 수 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
그때부터였다. 하늘과 땅의 영원(永遠)히 잇닿을 수 없는 상극(相剋)의 그 들판에서 조그만 바람에도 전후좌우(前後左右)로 흔들리는 운명(運命)을 너는 지녔다
황홀(恍惚)히 즐거운 창공(蒼空)에의 비상(飛翔)
끝없는 낭비(浪費)의 대지(大地)에의 못 박힘
그러한 위치(位置)에서 면(免)할 수 없는 너는 하나의 자세(姿勢)를 가졌다
오! 자세(姿勢)―기도(祈禱)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
** 갈대 섰는 풍경 -- 김춘수 **
이 한밤에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謨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 갈대와 여자와 바람의 시(詩) -- 정일남 ** 생각하는 갈대가 있었나 갈대는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나 낙엽이 깔리고 풀벌레가 죽는 일이 자신의 곁에서 일어났고 여울이 노래하니 갈대가 흔들렸다 갈대를 여자라고 우길 수 있을까 갈대라는 이름의 여자를 찾아서 착한 생각을 안겨주고 싶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 같은지 중생 같은지 생각하는 갈대가 지금도 있는지 생각만 하면 뭘 하나 바람은 또 얼마나 다리가 아플까 갈대와 바람은 사촌지간일세 여자는 돌미나리를 캐고 씀바귀를 캐며 병을 앓고 병을 사랑했다 바람은 갈대가 없으면 올 수가 없고 나는 바람을 사랑한 죄로 바람에 묶이니 물결이 운율을 잡아주는 시(詩) 시(詩)도 울 때는 갈대와 여자가 곁에 있었다 나는 단 한번 여자에 대해 울어본 적이 있다 생각하는 갈대가 울 즈음 ** 갈대꽃 -- 유안진 **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지난 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쌌는
손
그대의 흰 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꽃이 있었네. 하얀꽃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
바람 부는 들녘의 언덕에는 하얀 소복으로 바람 날리며 너울 ** 억새풀 -- 도종환 ** 당신이 떠나실 때 내 가슴을 덮었던 저녁 하늘 당신이 떠나신 뒤 내 가슴에 쌓이는 흙 한 삽 떠나간 마음들은 이런 저녁 모두 어디에 깃듭니까 떠도는 넋처럼 가으내 자늑자늑 흔들리는 억새풀
거리는 억새들의 잔잔한 한숨이 묻혀 있다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억새밭의 곁에 서면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렬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