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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산책

알테 내셔널 갤러리

한지톡톡권영애 2012. 5. 26. 10:13

 

알테 내셔널 갤러리

멀리서 보아도 들어가 보고 싶은 건물, 가까이서 보면 경외심마저 이는 건물. 아마 이런 효과를 달성하였다는 것은 건축가로서는 최고의 경지를 이룬 것이 아닐까?

  건축의 가장 큰 묘미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건축은 아무리 설계도에서 잘 그리고 미니어처를 잘 만들어도, 실제의 크기를 직접 느낄 수가 없다. 그러니 이미 계획하기 시작할 때 실제 크기가 주는 감동과 실제 장소에 세웠을 때의 감동을 미리 다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 계산도 않고 “세워놓았더니 생각보다 좋더라”라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 많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감동을 주는 건물 앞에 서면, 설계한 예술가에 대해 존경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 내셔널 갤러리는 일단 건물부터가 그 어떤 미술품보다도 더 미술적이다. 멀리서 보면 높은 제단 위에 올라선 붉은 파르테논 신전 같은 형상이다. 아테네의 진짜 파르테논은 다만 산 위에 있을 뿐 그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단 위에 있지만, 내셔널 갤러리는 아예 자기 본체만큼이나 높은 건물 위에 서 있어서 그 풍모부터 압도적이다.

  그리고 가까이 가면 양쪽으로 올라가는 계단부터가 심상치 않으니, 계단을 서서히 올라갈 때부터 그 감동이 미리 예약되는 그런 건물이다. 하지만 요즘은 보수 공사 때문에 그 계단을 사용 못하게 해서 아쉽다.

  대신 요즘 개방하는 계단 사이의 1층 문을 열고 들어간다.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정갈하고 그러면서도 섬세한 하얀 홀이 나타난다. 가운데에 입구가 있고 왼편으로 올라가는 비대칭의 계단이 육중한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백색, 단순, 정갈, 섬세의 네 단어가 주는 실내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대단하다.

베를린에는 내셔널 갤러리라는 이름의 건물이 사실 하나가 아니다. 바로 옆에 다음 기회에 소개할 지도 모르는 ‘노이에스 내셔널 갤러리’가 있어서 사실 이것은 ‘알테 내셔널 갤러리가’ 되는 것이고, 서베를린의 쿨투르 포럼에도 비슷한 이름의 거대한 미술관이 있다.

  이 알테 내셔널 갤러리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슈틸러의 설계로 1866년에 착공되어 1876년 완공된 것이다. 처음부터 그 때까지는 국립 예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그리고 점차 많아지던 근대 미술작품들을 전시할 목적으로 건축되었는데, 지금은 다시 옆의 노이에스 내셔널 갤러리와 작품을 나누어 소장하고 있다.

  최근에 1998년부터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데, 1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완공된 것이 아니다. 즉 3층 일부까지만 개방되어 있고, 바깥과 정원은 아직 공사 중이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가서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베를린에는 너무나 박물관들이 많아서 이 미술관을 빠뜨리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이 대단한 도시에 왔다면 이곳을 놓쳐서는 안 된다. 빠듯한 일정이라도 시간을 쪼개서 이곳을 방문한다면, 두 가지의 선물 즉, 하루 종일의 감동과 베를린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약속한다.

 이곳에는 무엇보다도 놀라운 몇 개의 조각들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회화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근대 작품들로서 마네, 모네, 세잔, 르누아르 등의 프랑스 인상파들과 멘첼, 뵈클린 등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인상파와 상징주의, 표현주의의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먼저 들어가면 방문객을 맡는 흰 방에 있는 대리석 조각들은 그 아름다움과 섬세함에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리고 독특하게 구성된 순로를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면 모든 방들에서 당신은 감동을 경험할 것이다. 오직 그 강도는 얼마나 여유를 갖고 시간을 투자하는가에 달려있을 것 같다.

  여기서는 일단 단 두 개의 그림만 소개해 본다.

  여기서 늘 재미있게 즐기는 것은 안톤 폰 베르너(1843~1915)의 <파리 교외의 숙영>이라는 그림이다.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 병사들이 파리 교외의 한 귀족의 집을 강탈하여 그곳에서 하룻저녁의 숙영을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사실적이고 의미가 깊은 그림에는 파리의 부잣집에서 피아노를 발견한 독일군들이 음악에 대한 감흥을 이기지 못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한 병사는 피아노에 앉아서 반주를 하고, 다른 병사는 흥취에 젖어 고향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다른 이 군인들은 그들의 음악을 감상하면서 전투 중에 향수에 빠진다. 또 다른 병사는 이 집의 하녀에게 수작을 걸고 있고, 병사들의 명령을 받은 젊은 하인은 장작으로 가져와서 벽난로에 땐다. 전쟁 중이지만 얼마나 아름답고 여유 있는 모습인가? 이것이 바로 망중한일 것이다. 전투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예술의 나라, 조국 독일을 그리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 음악을 느끼고 즐길 줄 안다. 그들은 모두 몇 개월 동안 얼굴에 맞았을 찬바람과 오랜만의 맞본 프랑스 와인으로 다들 두 뺨이 발갛다.

  나는 이곳에 오면 한참 이 그림 앞에 서 있곤 한다. 이 그림을 보면, 그림 가운데에서 꼭 독일 민요나 슈베르트의 가곡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늘 이 그림을 듣는다.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 나를 붙잡는 것은 바로 아놀드 뵈클린(1827~1901)의 <망자의 섬>이다.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섬뜩하고 가슴이 먹먹해져오는 감동을 느낄 것이다. 한 방 한 벽 가득히 뵈클린의 그림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는데, 대부분의 그림들이 소리를 회화로 묘사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이 <망자의 섬>(보통 <죽음의 섬>이라고들 부른다)이다.

  넓은 호수(혹시 바다일 수도 있다) 한 가운에 섬이 있다.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이 작음 섬은 오직 죽음을 위한 섬, 즉 묘지를 연상시킨다. 벽에는 알 수 없는 구멍들이 있어서 그것은 납골당 같기도 하고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창문 같기도 하다. 가운데의 뜰에 빽빽하게 서있는 사이프러스들 사이에 들꽃과 무덤 같은 것이 보인다. 너무나 숙연하지만 조용한 섬이다. 햇빛도 비친다. 이 섬에 작은 배가 다가가고 있다. 배에는 죽은 자의 관을 싣고 그를 떠나보내는 사람이 흰 옷을 입은 채 서서 섬으로 가다가고 있다. 약간 고개를 숙인 그녀(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여성처럼 보인다)는 그 작은 뒷모습만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느껴진다. 이런 것이 잘 그린 그림이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장면을 이보다 더 장엄하고 장렬하게 그릴 수 있을까? 나는 이 그림 앞에 반나절을 앉아 있다. 그림에서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중 <장송 행진곡>이 들려온다. 뵈클린이 그린 <망자의 섬> 시리즈는 대여섯 개 정도 되는 것으로 안다. 조금씩 구도와 느낌이 다르지만, 최고의 것은 바로 이 미술관에 있는 이것이다. 파트리세 쉐로가 연출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DVD를 보면 브륀힐데가 누워 있는 산 정상의 모습이 바로 이 그림의 구도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쉐로도 이곳 베를린에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가 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교향시 <죽음의 섬>을 작곡했다.

  음악이 그림이 되고, 그림에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곳. 그림에서 음악이 들리는 곳. 이곳이 베를린이다.  

 

 

풍월당 "박종호의 예술노트"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