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작가권영애의 건강노트 KH

한지작가권영애

한지작가 권영애의 건강노트KH

詩가 있는 산책길

시집 깊게 읽기-김윤현 편

한지톡톡권영애 2021. 1. 12. 11:04

들꽃을 함께 엿듣다

 

 1984년 도종환, 배창환, 정대호, 김용락, 정만진, 김창규, 김종인 등과 ‘분단시대’를 함께한 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이라는 직함 등을 떠올리며 귀납법적으로 김윤현 시인의 최근 시집 「들꽃을 엿듣다」를 규정짓자면 민중적 서정시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들꽃을 통한 언어 미학과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이라고 간단히 그의 시를 자리매김하기에는 도무지 허전하고 아쉬워 귓불이 가렵다.

 

 누리에서 피어오른 저 많은 들꽃의 언어를 김윤현 시인만큼 제대로 무릎을 구부리고 포복하며 들었던 시인이 더 있을까 싶기도 한데 연작시 한편 한편이 오롯이 눈과 가슴에서 피고 또 져서 채 모두를 읽기 전에 들꽃의 향연으로 상반신은 온통 질펀해진다. 이토록 꽃의 언어로 꽃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더불어 삶의 총체성까지 보여주는 작품은 참으로 귀하디귀해서 내 아는 모든 이에게 내가 조금 아는 시인이 지은 것이라며 자랑(?)하며 꼭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그동안 김윤현 시인「창문너머로」「사람들이 다시 그리워질까」「적천사에는 목어가 없다」등 세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으며, 현재 영진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주일이면 성당에 나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라고 손을 맞잡으며 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목덜미를 빳빳한 깃으로 감싼 사제복이 더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에겐 삶이 곧 문학이며, 문학 또한 자기성찰과 구도의 한 수단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시를 거저 취미삼아 쓰거나 폼 잡으려고 쓰는 작업이 아니므로 시도 삶처럼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재기 평론가도 해설에서 “1988년 첫 시집 「창문 너머로」에서 이번 제4시집 「들꽃을 엿듣다」에 이르기 까지 시인 김윤현의 시는 ’수행적 발화‘로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영역과 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행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적 세계는 어느 정도 일관성을 유지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느끼며, 느낀 만큼 감동받고 행복하다란 말은 대체로 수긍하지만 꽃말정도나 알고 들꽃을 배경으로 사진 한방 박는다고 모두가 감동을 전해받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넌지시 김윤현 시인의 ‘들꽃을 엿듣다’에 함께 기대어 보면 어떨까?

 

<시집 깊게 읽기4> 김윤현 편 - 권순진 엮음

 

 

 

 

 

 

 

채송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

꽃잎을 달고 향기도 풍기겠습니다

이름을 달지 못하는 꽃도 많습니다

토담 위라고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

메마르고 시든 일상에서 돌아와 그대

마음 환하게 열린다면 그만이겠습니다

몸을 세워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 살아갑니다

 

 

산국

 

잎인 듯 꽃을 피웁니다

꽃인 듯 한잎 두잎 답니다

잎이라도 반겨줄 이가 있고

꽃이라도 사랑해줄 이가 있겠지요

웃고 지내는 날은 별이 뜰 것이고

울며 지내는 날은 별이 질 터이니

잎인 듯 꽃처럼 싱그럽게 웃기도 하고

꽃인 듯 잎처럼 활짝 웃기도 합니다

산등성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계곡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

알고 보면 나의 다른 이름이지요

 

 

갈대

 

생각이 깊으면 군살도 없어지는 걸까

삶을 속으로 다지면 꽃도 수수해지는 걸까

줄기와 잎이 저렇게 같은 빛깔이라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는 묵상이 필요할까

물 밖으로 내민 몸 다시 물속으로 드리워

제 마음속에 흐르는 물욕도 다 비추는

겸손한 몸짓이 꽃의 향기까지 지우네

 

 

 

 

개망초

 

가뭄에도 몸을 낮추어 견디고

목이 타는 햇볕에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이제 삶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외진 곳이나 바로 서기 불편한 곳에서도

말없이 아름답게 피는 개망초를 보며

인생을 더 긍정하기로 했다

보아라, 비탈진 산하에서도

고개 끄덕이며 사는 것들은 다 아름답지 않은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며

낮은 곳에서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편편한 들판이 아니라 해도

가지런한 논둑이 아니라 해도

다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다

 

 

백리향

 

백 리를 가서 백 리를 찾지 마라

천 리를 가서 천 리를 구하지 마라

백 리를 얻으려면 천 리를 가야 한다

백 리를 죽자고 달린다 해도

십 리밖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삶이다

그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빈 곳마다 다 꼭꼭 채우고 살 수는 없다

십 리를 가려면 백 리를 달려야 하고

백 리를 달렸을 때 십 리를 생각하면

그때 생은 향기에 젖을 것이다

백 리를 얻으려면 천 리를 가야하고

백 리를 버려야 십 리를 얻을 수 있다

 

백리향의 말씀입니다

 

 

붓꽃

 

네가 행복해진다고

내 행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허공에다 붓으로 적는다

 

네 슬픔이 줄어든다고

내 슬픔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창공에다 붓으로 그린다

 

산다는 게 그 무어냐고 둘러봐도

해처럼 뚜렷하지 않지만

웃음은 네가 먼저 짓고

눈물은 내가 먼저 흘리는 게 사는 거라며
허공에다 연신 붓질한다, 저 붓꽃이

 

 

 

 - 시인의 말 -

 

 풀꽃은 들판이든 길가든 어디에서고 피어서는 사람들에

게 수많은 말의 빛깔과 향기를 보낸다. 그들은 바람이 불거

나 비가 와도 혹은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변함이 별로 없

다. 사람들에게 오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오지 않는다고 실

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 동안 그들에게서 아무런 말도 듣

지 못했다. 혹 듣는다 해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말을 하려는지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보니 풀

꽃은 내게 무슨 말을 한 게 분명하다. 나는 그 말을 들어보

려고 풀꽃들을 많이 찾아 다녔다.  백두산 트레킹에 나섰을

때도 모진 겨울을 이겨낸 풀꽃들에 이목구비를 집중하며

하루 종일 보냈다.

 풀꽃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

는 그들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보기도 하고, 인간의

언어를 그들의 말로 옮겨보기도 했다. 그런 작업을 하면서

꽃이 한 말 속에는 때로는 웃음이 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이 고여 있기도 한 것을 보고 느꼈다. 그것들을 내 마

음대로 짐작해 본 것을 이번 시집으로 묶어 보았다. 이 허

술하고도 한가한 느낌을 시로 풀어내는 일은 또한 얼마나

하릴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하릴없는 작업 속

에 배어있는 웃음과 울음의 빛깔과 향기를 이 시를 읽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

다.

 

                                     김윤현

'詩가 있는 산책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휴식  (0) 2021.01.14
매화  (0) 2021.01.13
노루귀  (0) 2021.01.12
다시  (0) 2021.01.09
나에게 말하네  (0) 2020.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