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장)
한국인이 이 책을 펼친다면 프롤로그에서부터 눈길을 떼기 어려우리라.
한국의 생생한 사례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함께 줄줄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재직하는 저자 장하준 교수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전개된다. 저자는 1963년 10월 7일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밝힌다.
그 무렵에 한국이 얼마나 가난했기에 그런 표현이 나왔을까. 1961년 한국의 연간 1인당 소득은 82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나의 1인당 소득 179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저자가 어린 시절에 살던 서울 북서쪽 변두리 집은 방이 2개인 조그만 시멘트벽돌 가옥이었단다. 주변의 낡은 집에 비해 모양이 번듯했다. 정부의 노후 가옥 개량정책에 따라 외국 원조자금으로 지어진 현대식 집이었다. 그래도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기온이 영하 15~20도로 내려가면 몹시 추웠다. 변기도 수세식이 아니었다고 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산업자원부 장관, 국회의원, 주택은행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장재식 선생이다. 장 선생은 두뇌가 비상하고 집념이 강한 인물이다. 바둑에서 아마추어로서는 최고수급이다. 그는 “유희 가운데 으뜸을 치라 하면 실내에서는 바둑, 실외에서는 골프”라고 말할 정도로 여유를 가졌다.
장 교수는 세계 명문학교인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다. 주주 운동을 이끄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사촌 형님이니 이들이 명문 가문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장재식)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흑백TV와 냉장고를 마련해왔다. 알뜰하게 모은 장학금으로 구입한 소중한 물건이었다. TV에서 생중계하는 스포츠 경기를 보려고 이웃 주민들이 집에 자주 놀러왔다.
저자는 1970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한 학급 학생수가 65명이나 되었다.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체벌이 횡행했고 주입식 교육이 불가피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에 앞장섰다.
정부 주도로 여러 산업정책이 수행됐다.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출은 신앙과 같은 개념이었다. 가히 ‘수출 전쟁’이 ‘산업 역군’에 의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은 1973년 이후엔 제철, 조선 등 중화학 공업에 역점을 두었다. 한국의 국내외 전문가들은 무모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놀라운 성과가 나타나며 고속 성장이 이어졌다. 1972~1979년 사이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배가 넘게 증가했다. 수출은 9배로 늘어났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속도였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평이 나왔다.
저자가 살아온 45년 사이에 한국의 경제성장과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는 놀랄 만하다. 한국은 최빈국에서 출발해 1인당 소득이 포르투갈과 맞먹는 나라로 자랐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텅스텐, 가발 등에서 이제는 이동전화기, 평면 TV, 자동차 등으로 고도화되었다.
한국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자유 시장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들은 “한국은 안정된 통화 가치와 작은 정부를 갖추고 민영 기업과 자유 무역을 토대로 경제를 운영하며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고 보충 설명을 한다.
이런 견해는 애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흔히 ‘신자유주의 경제학’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허구를 파헤치자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음험한 권모술수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할 때 ‘냉철한 머리’뿐만 아니라 ‘뜨거운 가슴’까지 동원한 듯하다.
먼저 일본 도요타 자동차 사례가 소개된다.
도요타가 미국에 자동차를 처음 수출한 때가 1958년이었다. 미국 소비자 눈으로는 당시의 도요타 자동차는 ‘바퀴 4개에 재떨이 하나’라고 불러도 될 만큼 조잡한 싸구려 제품이었다. 미국인들은 이를 외면했다.
충격을 받은 일본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자동차 수출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곳에 돈을 쏟아 부어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방직기나 만들면 될 것이지 과욕을 부리면 나라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도요타를 살리기 위해 특혜 금융을 지원했으며 수입 자동차에 대해 높은 관세를 물렸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도요타의 렉서스는 고급 승용차의 상징 브랜드 아닌가. 일본은 자동차 강국으로 부상하지 않았나.
저자는 “일본 정부가 1960년대 초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말을 따랐다면 렉서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지적한다. 일본 정부가 의지를 갖고 일정 부분에서 시장에 개입한 결과라는 것이다.
일본이 당시에 ‘글로벌 스탠더드’에 충실했다면 지금 여전히 3류 산업 국가로, 칠레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비슷한 소득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란 분석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선진국들이 후발 개도국에게 강요하는 기준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강렬하게 비판한다. 자유 경쟁,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선진 강국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기준이라는 것이다.
영국, 미국도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 쌓았다가 자국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자 자유무역의 기치를 높이 든 역사가 있다. 일본, 독일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세계화의 진실’을 살펴보면 강대국의 이익을 좇는 방향으로 세계화가 진전되었다고 설명한다. 부자 나라들은 약소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면서도 다른 한편 스스로는 매우 높은 관세를 유지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이 대표적인 국가이다. 흔히 보호무역의 본가처럼 알려진 프랑스, 독일, 일본이 사실상 영국과 미국보다 관세장벽이 낮았다.
보호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나라들은 자신들이 강대국 반열에 오른 다음에는 강대국에 오르는 데 필요한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개념을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저서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만원 버스에 탄 손님은 버스가 얼른 떠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버스 밖에 있는 사람은 기를 쓰며 타려고 한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심경이 다르다. 나라끼리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선진 부국은 버스에 탄 손님과 같다. 다른 승객이 타면 혹시 자리를 뺏길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출발하는 버스에 겨우 올라 탄 손님도 조금 전과는 마음이 바뀐다. 다른 사람의 탑승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의 사례를 아래와 같이 들면서 설명한다.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강요해 왔다는 사실 역시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이다. 이미 안정된 자리를 차지한 나라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사용해 효과를 보았던 민족주의적인 정책들을 통해 경쟁국들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부자 나라들의 클럽에 최근 합세한 나의 모국 한국도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은 한때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보호주의적인 나라였지만, 지금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제조업에 대한 관세를 크게 낮출 것을 주장한다. 한국은 한때 해적판의 천국이었는데도 지금은 중국과 베트남에서 한국 가요의 해적판 CD와 한국 영화의 해적판 DVD를 만드는 것을 걱정한다.
더욱 어이없는 현실은 한국에서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이들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 어느 시기에 국가 개입주의와 보호 무역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장본인들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마도 해적판 미국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서 자유 시장 경제학을 배웠고, 여가 시간엔 해적판 로큰롤 음악을 듣거나 해적판 할리우드 영화 비디오를 본 사람들일 것이다.
절묘한 비유와 사례가 그득하다. 저자 자신도 한국에서 해적판 경제학 서적으로 공부했다고 털어놓았다.
저자는 부자 나라들을 ‘나쁜 사마리아인(Bad Samaritans)’이라고 비유한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착한 사마리아인과 다르다는 것이다.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단다. 6세 어린이에게 어른의 규칙을 강요한다는 것. 그 규칙이 바로 신자유주의요, 글로벌 스탠더드이다.
이들은 개발 도상국들에 자유무역을 권장하면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무역에 가깝게 실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는 것.
자유주의 신봉자들은 흔히 국영기업, 공기업을 비효율 덩어리라고 폄훼한다. 소련 등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것은 국영기업의 비효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반론을 펼친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싱가포르항공의 사례를 보자. 이 기업은 효율적이고 친절하다는 점에서 세계 정상급이다. 35년동안 단 한해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싱가포르항공은 국영기업인데도 성공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정부 관련회사들이 전화, 전력, 운송 등 공익 부문뿐만 아니라 반도체, 조선, 엔지니어링, 해운, 은행 등 민간 부문까지 진출해 좋은 성과를 낸다.
한국에서도 포스코가 국영기업으로 출발해 성공 신화를 이뤄냈다. 1960년대 말, 한국 정부는 현대적인 제철 공장을 짓는다며 세계은행에 융자를 신청했다. 세계은행은 “이 사업 계획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사료된다”며 거절했다. 한국에는 제철에 필수 원료인 철광도 태부족했고 가까운 중국에서 수입할 수도 없었다. 머나먼 호주에서 철광석을 수입한다니 성공 가능성이 보였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1973년 조업을 시작한 포스코는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우량 제철회사로 부상했다.
시장이 너무 확대되면 부정부패가 생기기 쉽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흔히 “부정부패를 억제하려면 민간 부문을 늘리고 공공 부문에 시장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공공 부문에 민간의 입김을 늘리면 뇌물 수수가 이뤄질 기회가 늘어난다고 지적한다. 민간과 공공 부문의 인적 교류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유착 관계가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부정부패는 대개 시장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존재한다”며 “신자유주의 정통파가 줄기차게 밀어붙이는 규제 완화를 통해 시장기능을 확대하면 상황은 더욱 악화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부르짖는 자유무역, 민영화 등이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실패한다면 비(非)정책적인 요인, 즉 정치와 문화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발전에 확실하게 좋거나 확실하게 나쁜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단지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문화 안에 든 ‘원자재’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일본이 가난한 나라였을 때는 유교라는 문화 전통 때문이라 했으나 부자가 된 이후엔 협동을 중시하는 일본 유교 문화가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는 것이다.
저자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WTO 등 3대 국제기구를 ‘사악한 삼총사’라 규정했다. 개발도상국에게 끊임없이 부당한 기준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들 기구는 ‘나쁜 사마리아인’의 충실한 하수인이라는 것.
이 책을 추천한 인사들의 면면을 봐도 이 책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노엄 촘스키가 선봉에 섰다. 언어학의 석학이었던 그는 중년 이후엔 사회운동가로 활동한다. 그는 장하준의 책에 대해 “탄탄한 경제학 이론과 역사적 증거에 기반해 세계 경제를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문명화된 형태로 개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안한다”고 극찬한다.
촘스키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여전히 석학으로 대접 받는데 비해 미국에서는 주류 언론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인물로 전락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조셉 스티글리츠 박사도 “세계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책”이라 상찬한다.
장하준 교수의 이 책은 버스를 타지 못한 사람의 논리에 바탕을 두었다. 한국의 세계화 현주소는 어떤가. 이미 버스를 탄 승객이다. 한국으로서는 WTO 원칙에 따라 자유무역주의가 확산되어야 유리하다.
장하준 교수의 다른 저서 ‘쾌도난마, 한국경제’처럼 ‘나쁜 사마리아인들’도 읽을 때는 속이 후련하며 공감하지만 그의 주장을 선뜻 실현하기 어려운 것은 한국경제가 이미 선진국 질서에 편입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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