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속 스승들이 모여있는 곳
제게 서재(도서관)란 지혜와 지식의 보물창고입니다. 서재를 지혜의 창고라고 표현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에게 서재란 단순히 책을 보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좀더 추상적인 개념을 지닌 공간이에요. 제 삶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공간이지요. 살아오는 동안 운 좋게도 방대한 지혜와 무수한 경험을 지니신 분들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다들 해당 분야에서의 전문가들이기에 제가 연락을 해서 ‘이것 좀 설명해 주세요.’, ‘이 아티스트에 대해 알려주세요.’, ‘이것과 이것은 어떤 관계가 있어요?’ 라고 질문을 하면 곧바로 대답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많은 분들은 아니지만, 이분들도 제게는 서재이자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제 친구가 ‘지혜로운 사람이 죽으면 서재 하나가 타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맞는 말이에요.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삶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는 볼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서재를 단순히 책이 있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지혜가 모여있는 창고라고 하고 싶습니다. 개인 서재(책장)도 역시 지혜의 창고지요. 몇 년 동안 온 세계를 누비면서 살아와서 그런지 제 물건은 한 곳에 있지 않아요. 책이나 악보는 무거운 편이죠. 그래서 악보는 대부분 UCLA의 스튜디오에 있는 멋진 블랙 캐비닛에 보관돼 있고 책은 주로 뉴욕 집 제 침실에 있어요. 책장이 있긴 한데 좀 지저분해요. 잠들기 전에 책 읽는걸 좋아해서 침대 옆 책장에 항상 책을 놓곤 하는데 그곳이 개인 서재나 마찬가지죠.

위대한 예술의 공통점은 시공을 초월한 감동
위대한 문학은 인간의 상태를 진실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삶을 관찰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위대한 음악이나 위대한 예술,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스타일이나 시대가 다를 순 있지만 시공을 초월해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모든 위대한 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죠. 대표적인 예로 베토벤이나 셰익스피어가 있습니다. 문학계에서 셰익스피어를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고 생각해요. 셰익스피어의 연극대본에는 매우 심오한 대사가 많아요. ‘네 자신에게 진실하라’와 같은 대사는 시공을 초월한 감동을 선사하기도하죠. 베토벤도 마찬가지예요. 베토벤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감각을 잃어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역대 가장 위대한 곡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음악세계를 완전히 변화시킨 혁명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에게는 시공을 초월한 감동을 선사하는 진실성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은 책이 특별히 있지는 않아요. 이미 수많은 작곡가들이 더 훌륭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죠. 가장 위대한 사랑이야기인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경우 음악으로 수없이 표현되었죠. 이처럼 완전한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 건 가능하지만 음악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책 외에도 경험 등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죠.
독서할 때는 책에만 집중해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만) 책 읽을 때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멀티태스킹이 안되거든요. 한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합니다. 독서하기엔 최악의 시간이긴 하지만 주로 취침 전에 책을 읽습니다. 하루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이기도 하죠. 저는 공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요. 연주자들은 보통 모든 에너지를 자신의 공연에 쏟아 부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공연 후에 숙소에 돌아가서도 감정이 충만해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침대에 누워 바로 잠드는 일은 가장 하기 싫은 일이에요. 사실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조깅을 하고 싶어도 너무 늦은 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저는 일단 제가 좋아하는 목욕을 하고 긴장을 푼 다음에 침대에 누운 채 책을 읽어요. 최근에는 아이패드를 살까도 생각해봤어요. 음악과 책을 쉽게 저장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종이악보를 더 좋아해서 아직 살지 말지 결정을 못했어요. 아이패드로 악보를 보는 동료가 몇 명 있기는 해요. 손으로 살짝 터치하거나 발로 페달을 밟으면 악보를 넘길 수 있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모니터 속의 가상물체보다는 실제 존재하는 종이의 느낌이 제게 안도감도 주는 것 같고 더 좋아요.
음악, 달리기, 독서의 공통점은 순간을 느끼는 경험
(저는 달리기를 매우 좋아하는데요.) 혼자 뛸 때면 제가 살아있는 걸 느낍니다. 얼굴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 있는 자연 속에 제가 있는 거죠. 시간은 그리 중요치 않아요. 뛰는 그 순간 현재를 느끼는 건데 이런 게 너무 좋아요. 저는 늘 계획을 세우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생활을 해 왔거든요. 마라톤도 마찬가지로 큰 경기를 앞두고 연습을 해야 하는데, 마라톤 선수들 대다수가 실제 경기보다는 연습과정을 더 즐긴다고 생각합니다. 목표지향적이라기 보다는 과정지향적인 사람들인 거죠. 저도 과정지향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음악가로서 연습을 좋아하고 리허설과 배우는 것을 즐기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공연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다 합쳐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공연도 매우 좋아합니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공연 그 자체보다는 연습과정이 더 좋아요. 재미있기도 하고 조깅처럼 항상 그 순간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죠. 독서도 마찬가지예요. 독서를 할 때 산만해지기도 쉽지만, 한 문학작품에 몰두하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느낌을 받고 그 순간을 느끼게 되는 거죠. 분명 내 생각 속이지만 타인이 만든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에요. 정말 집중했을 때 그 순간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음악과 달리기, 독서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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