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노래
- 이기철-
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 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철쭉꽃 따라 / 이기철
지치면 언덕에 누워 풀피리를 불었다
내 부는 풀피리 소리만큼
하늘은 어깨 위에 내려와 앉고
제 혼자 피고지는 패랭이꽃들에도
내 소년은 즐거웠다
연두빛 기슭에서 내가 연두빛이 되어 돌아오는 저녁엔
목매기와 저녁새들만 내 친구가 되었다
또 봄이 가고 봄빛도 제 물에 회색이 되는 날
철쭉꽃 한 송이 꺾어 나는 뉘에게 바쳐야 하나
들 가운데 놓쳐버린 내 신발짝 간 데 없고
내 어깨를 짓밟으며 험한 세월만 흘러갔다
나무 같은 사람 / 이기철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그 둥치 땅 위에 세우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 놓고도
제 모습 땅 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 같은 사람 만나면
그의 안 보이는 마음 속에
돌 같은 방 한 칸 지어
그와 하룻밤 자고 싶다
햇빛 밝은 저자에 나가
비둘기처럼 어깨 여린 사람 만나면
수박색 속옷 한 벌 그에게 사주고
그의 버드나무 잎 같은 미소 한 번 바라보고 싶다
갓 사온 시금치 다듬어놓고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시금치 같은 사람
접으면 손수건만하고 펼치면 저녁놀만한 가슴 지닌 사람
그가 걸어온 길 발에 맞는 평상화
늦은 밤에 혼자서 엽록색 잉크로 편지를 쓰는 사람
그가 잠자리에 들 때 나는 혼자 불켜진 방에 앉아
그의 치마 벗는 소리를 듣고 싶다.
기다림은 나무를 키 크게 한다 / 이기철
기다림은 나무를 키 크게 한다
햇살이 순금의 얼굴로 찾아오면
길 위를 지나는 사람의 마음이
오전의 풀밭 같이 푸르러진다
꽃들이 열매가 되기까지는
바쁜 마음을 내려놓고
돌멩이처럼 기다리자
바람이 그 여린 손으로 길을 쓸 때까지는,
밤에는 외로움을 이긴 나무들이
욕망을 이긴 성자 같다
바람이 나뭇잎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샘물이 땅 위로 솟는다
물소리는 들길을 씻느라 바쁘고
언덕은 놀 한 겹 다시 거는 일로 분주하다
어찌하면 저 굳게 닫힌 집들의 입을 열어
나와 함께 맑은 노랠 부르게 할까
아침이 오면 금새 밝아지는 마을과
오래된 집들에 새 문고리를 달아주자
그들의 하루가 햇빛처럼 신선해지도록
그들의 하루가 노래처럼 즐거워지도록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처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